1970년대는 자동차 광고의 여명기라 할 수 있다. 동이 틀 무렵이란 뜻의 여명기란 말 그대로 한국 광고사에서 1970년대 자동차 광고는 새로운 빛줄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사실 1970년대 광고들은 대부분 제약, 식품 및 제과, 음료 등이 대부분이었다. 1970년대 10년간 실행된 TV 광고를 예로 들면, '열두 시에 만나요 부라보콘'(해태제과), '코코시럽'(삼아약품), '코코코 투리투잘'(부광약품), '흔들어 주세요, 써니텐'(해태제과), '아빠 오실 때 줄줄이 사탕'(동양제과), '형님먼저 아우먼저 농심라면'(농심) 등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자동차 광고는 메시지와 크리에이티브 등에서 새로움을 주었다. 먼저 1974년 첫선을 보인 기아의 브리사 광고는 '중후한 멋'을 헤드카피로 삼았다. 자동차의 기술적측면 보다 가치적 측면을 강조하여 '품격'을 설득 포인트로 삼았다. 마치 '품격 높은 최고 자동차'를 타는 사람은 마치 최고의 인격과 멋의 소유자일 것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자동차는 나를 대신하는 또 다른 표현물이라는 자동차에 대한 사회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브리사의 또 다른 인쇄광고는 자동차의 경제성을 중심 메시지로 삼았다. '절약시대의 자동차는 브리사'라는 메시지 구축에 공들였다. 왜냐하면 1973년 중동전쟁으로 촉발된 제1차 석유파동으로 자동차 기름값에 대한 민감성이 커졌기 때문. 석유 값이 생산지에서 한 해 17% 오르고 매년 5%씩 석유 생산을 줄인다는 OPEC의 결정은 자원민족주의를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1975년 2차 석유파동을 포함해서 1970년대 두 번에 걸친 석유파동은 자동차 선택에서 연비 등 유지비에 대한 소구 포인트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소비자의 합리성을 강화하는 광고의 사회적 역할이 시도된 셈이다. 동시에 이 광고의 크리에이티브 모티브가 가족이란 점이 눈길을 끈다. 남편이 운전하고 아내와 딸이 정겹게 뒷좌석에 앉아 있는 비주얼을 크리에이티브로 삼았다. 지금은 상식이 된 가족이라는 광고 소재가 40여 년 전 브리사 광고에서 꿈틀거렸다.
현대자동차의 포니 광고는 ‘우리 힘으로 만든 자동차’를 핵심 메시지로 삼았다. 1975년 포니를 탄생시킨 현대자동차는 이듬해인 1976년 1월 신문 전면광고에서 ‘세계에서 16번째 자동차 생산국으로 등장’한 한국을 강조하였다. 포니 출시를 통해서 국가 산업적 의미를 국민과 함께 나누겠다는 포부를 이 광고를 통해 펼쳤다. 또한 ‘80년대를 향한 공업한국’을 위한 현대차의 의지를 드러냈다. 디자인은 초록색 바탕에 하늘 닿는 곳에 포니의 옆 모습을 광고 지면에 옆으로 꽉 차게 레이아웃하여 포니를 우뚝 솟은 산봉우리에 비유했다. 우측 상단에는 ‘1월 26일 계약개시’를 별모양으로 주목도 높게 알림으로써 판매촉진의 역할도 병행하였다.
포니의 또 다른 ‘해외 수출 광고’는 국민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초점을 맞췄다. 1997년부터 해외수출을 시작한 현대자동차 포니는 그 다음해 자동차 수출전략 산업화 추진 등에 힘입어 본격 수출 길에 오르게 된다. ‘한국의 포니, 드디어 대량 수출 개시’ 단 하나의 카피와 수출하기 위해 화물선에 선적하는 포니의 비주얼을 보여주었다. 포니의 해외 수출을 국민에게 알리면서 국민들에게 더 신뢰받는 자동차라는 인식을 갖게 하여 포니의 구매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촉진제로 광고를 활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새한자동차 '제미니' 광고는 제미니라는 3음절 브랜드를 인식시키는데 주력했다. '제~미~니~ 탄생'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으로 TV 광고를 시작했다. '세계 정상의 기술'로 만들었다는 점을 강점으로 삼았다. '독일'에서 개발되고 '세계 20여개 국에서 사랑받는' 자동차임을 카피로 풀었다. 비주얼 면에서는 여성 모델이 차를 품는 감성 터치도 곁들였다. 1955년 우리나라 최초 자동차 광고인 시발 자동차 광고에 등장한 자동차와 여성 모델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세계의 차, 당신의 차 제미니'라는 엔딩 카피를 통하여 고급감을 끌어올리는데 주력하였다.
1970년대 자동차 광고는 한국 광고사에서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개인적 관점, 사회적 정체성, 그리고 국가 산업적 관점에서다. 첫 번째 개인적 관점에서 보면, 자동차 광고는 '순간적 만족감'에서 '지속적 만족감'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동차 광고가 본격 등장하기 이전의 많은 광고들이 먹고 마시는 '순간적 만족'에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면 자동차 광고는 내 곁에서 오랫동안 함께 하는 '지속적 만족'을 주는 주체로 묘사되었다. 세계 최고, 중후한 멋 등과 같은 고급감이나 세련미가 터치 포인트였다.
두 번째 사회적 정체성 면에서, 자동차 광고는 나를 드러내는 사회적 표현물로 작동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70년대 자동차는 사회적 부의 상징이었던 텔레비전, 냉장고, 자동차 중에서 으뜸이었다. 예를 들어, 국민 자동차로 불린 현대자동차 '포니'의 가격이 2백28만9천 원이었는데, 이는 1970년대 당시 대기업 사원 월급이 10만원 정도였으니 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금액이었다. 1970년도 자동차 보유대수가 10만대를 넘으면서 시작한 70년대 자동차 광고는 사회적 부를 드러냈다.
세 번째 국가 산업적 관점에서 자동차 광고는 국민적 자긍심을 촉진하였다. 1970년대는 자동차 산업이 고속질주 할 수 있는 초석을 놓는 시기였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던 1970년도에 자동차 엔진공장 건설 추진계획이 발표되고, 1973년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 준공이 준공되어 그다음 해인 197년 기아산업 고유모델 브리사가 출시되었다. 1975년 새한자동차의 레코드 로얄이 출시되었고, 기아차의 중동지역 첫 수출이 이뤄졌으며 1976년 현대자동차 해외수출이 시작되었다. 1970년대 자동차 산업의 발전과 함께 자동차 광고는 오랫동안 가난과 해외 영향력에 짓눌린 우리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렇듯 1970년대 자동차 광고는 나와 사회 그리고 국가를 이어주는 소통의 다리였다. 왜냐하면 이 시기 자동차 광고는 개인적으로는 지속적인 만족감을 가져다주고, 사회적으로는 자아 정체성 욕구를 불러일으키며, 국가 산업적으로는 국민적 자긍심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