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시대의 사람들은 자동차를 ‘쇠나귀’라고 불렀다. 자동차가 익숙하지 못한 시절에 자동차를 위한 도로와 여행 구간이 만들어졌고, 사람들은 꺼멓고 집채 같은 큰 수레인 자동차를 막대기로 찔러보기도 했다. 외국 자동차가 한국에 들어와서 자동차의 꿈을 실어주던 일제 강점기의 생활상과 1960년 이전의 시대 생활을 지면 광고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인력거와 함께 자동차의 광고가 함께 등장하던 시절
일제강점기(1910-1945) 시대에는 다양한 상품광고가 등장했으며, 광고가 생활 정보의 하나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이 시대에는 대부분이 일본의 상품이었으며, 자전거, 자동차, 유성기(축음기), 시계 등의 광고가 있었다. 1911년 왕실과 총독부에 각 1대씩 2대의 리무진 승용차가 들여오게 된다. 1912년에는 자동차와 함께 인력거(그림-01 참조)가 유행하던 시기였으며, 같은 시기에 일본인과 한인의 합작으로 서울에서 택시 임대사업이 최초로 시작되었다.
일제는 1910-20년 동안에 군사적 목적을 위한 새로운 도로, 즉 신작로를 건설하면서, 조선의 낙후된 도로를 새롭게 건설한다는 과시를 광고를 통해 알렸다. 도로의 확충과 더불어 1918년에 212대에 불과했던 자동차는 1925년에 1,200대, 26년엔 1587대로 늘어났다. 자동차 광고는 1917년대에 자동차의 운행을 알리는 광고를 통해서 인쇄 매체에 소개되고 있으며, 1920년대 후반부터는 다양한 회사로부터 광고가 나오기 시작한다. 1916년 6월 24일자 매일신보에는 서울∼춘천 간의 왕복 여행을 알리는 광교경춘자동차조의 광고(그림-02 참조)가 실렸으며, 1917년 3월 10일 자에는 경남자동차상회가 경성-충주 간 직통운행을 알리는 광고(그림-03 참조)가 실렸는데, 이는 당시 자동차를 이용해서 여행을 즐기는 자동차마니아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일제의 신작로 건설광고와 지역 간 운행 광고
이 당시에 사람들은 자동차를 ‘쇠나귀’라고 불렀다고 한다. 1917년 5월 16일자의 신문에 ‘자동차와 향인의 경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자동차’를 왜 쇠나귀라고 불렀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꺼멓고 집채같이 큰 수레에 네 바퀴에 기둥 같은 데가 있고, 뿡뿡하면 가고 뿡뿡하면 서되, 이것이 필팔명의 사람을 싣고 높은 언덕을 총알같이 달리되 대체 이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요술차냐 신통차냐 제갈공명의 목우유마 같은 것이냐.”라고 신기해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보고 막대기로 찔러보기도 했으며, 차 안에 번갯불이 들었다는 낭설을 믿고 타 죽을까봐 아예 접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지면에 사용된 글은 강준만의 “한국 자동차의 역사, 1903~2006 자동차는 꿈을 싣고 달린다(2006년)를 참조하여 구성하였다)
이 시기에는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 관광택시가 등장했으며, 부자들은 관광택시를 이용하여 서울을 돌아다니는 색다른 취미를 갖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자동차의 직통 운행에 관한 광고가 생겨나고, 자동차 여행자가 등장하자 중앙자동차 조합에서는 수원~강릉 간 자동차 시간표와 함께 요금 안내 관련 광고도 등장했다(그림-04 참조)
이렇듯 자동차는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당시에는 부자만 즐길 수 있었던 탓에 자동차 여행 또는 드라이브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는데, 기생들까지 자동차 드라이브를 즐기게 되자, 1920년 조선총독부는 경성 장안의 5개 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이 자동차를 타고 나들이하면 엄벌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속되었던 포드자동차의 판매 및 서비스 광고
1928년 2월에 신형 포드자동차 판매를 알리는 전면광고가 나와서 눈길을 끌었다. 1928년 2월25일에는 “긔여이 신 포-드 자동차가 출래”라는 헤드라인으로 다양한 신형 포드자동차가 전시되고 있음을 알리는 광고가 게재(그림-05 참조)가 되었으며, 1928년 3월23일자에는 포드자동차의 사장인 헨리포드가 등장하여, 신형포드자동차 판매를 위한 행사장에서 자사 차량의 우수성에 대한 연설을 인용하여 광고에 게재 했다(그림-06참조).
1928년에는 차량의 내부구조를 보여주는 광고(그림-07 참조)와 애프터서비스를 강조하는 광고(그림-08 참조) 등 신형 포드자동차 판매를 알리는 다양한 광고가 나와서 눈길을 끌었다. 포드자동차의 광고는 자동차 본체의 해부도, 서구 도심지를 달리는 자동차의 묘사, 헨리 포드의 초상화와 연설문을 인용해서 자사 차량의 성능이 우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포드자동차의 광고는 1935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는 광고의 효과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그림-09 참조). 당시의 통계에 따르면 자동차의 수는 1931년에 4,331대로 늘어났다. 또한 1945년 8.15 광고당시 자동차 수는 7,300대 정도였는데, 이 중 반수는 트럭이었고 나머지 반수는 승용차 및 승합자동차였다고 한다. 자동차 수는 1947년에도 1만대(서울3,800여 대), 1948년 말 1만 4,000여대였다는 통계가 있다(통계는 강준만의 “한국 자동차의 역사, 1903~2006 자동차는 꿈을 싣고 달린다(2006년)를 참조했다).
제네럴모터스사의 시보레 승용차와 폰티악 광고
1930년부터는 일본 제네럴모터스사(GM)의 시보레(Chevrolet) 승용차 폰티악(Ponitac)과 트럭 등 다양한 자동차광고가 실리게 된다. 이렇듯 자동차가 점차 알려지고 대중화되자, 개별 브랜드의 광고가 등장하기 시작한다(그림10-13 참조).
한국전쟁의 페허 속에서도 꿈틀거린 자동차의 꿈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이 되고, 한국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자동차에 대한 꿈은 꿈틀거렸다. 1954년에는 최무성 삼형제가 국산차를 만들고자 기존의 <국제공업사>를 <국제차량주식회사>로 확대하여 개편하여, 최초의 국산 자동차인 ‘시발’자동차가 탄생하게 된다. 이는 신문에도 보도되고, 신문광고도 등장한다.
또한 1955년 2월에 김창원·김제원 형제가 신진공업사를 설립하면서, 한국에는 자동차의 꿈이 꿈틀거렸고, 1959년에는 자동차 관련 부품도 광고에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회사가 한국 타이야 제조주식회사였다.
<한국신문연감 1968> 자료를 보면 1940년대의 매체의 수는 매우 빈약했으며, 경제활동 역시 매우 미비했다. 매체의 양을 살펴보면, 1947년에 통신 14개, 일간지 42개, 주간지 100개, 월간지 301개, 기타간행물 94개로 합계 551개 정도밖에 없었다. 가장 큰 매체라 할 수 있는 일간신문의 경우를 보더라도 1958년에야 겨우 하루 8면밖에 발행하지 못했다. 특히 동아일보의 경우, 총수입 중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8년에 겨우 23%에 지나지 않았을 정도다(본 자료는 전응덕 외 편집위원회의 <한국광고100년(1996년)>을 통해 재인용했다.) 당시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개인당 GNP가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고, 기업의 경제활동이 빈약했으며, 이에 따라서 광고의 게재도 매우 미비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도 자동차를 향한 꿈은 지속적으로 피어났으며, 이로 인해서 자동차제조 회사가 속속 설립되었다. 1950년대 말을 기점으로 자동차산업이 성장하면서, 1960년대의 빠른 성장을 예고하게 되었으며, 매체의 수와 광고의 수도 꾸준하게 늘어나게 된다.
참고문헌
전응덕 외 편집위원회, <한국광고100년>, 사)한국광고단체연합회, 1996.
강준만, 한국 자동차의 역사, 1903~2006 자동차는 꿈을 싣고 달린다, 인물과사상,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