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카 시대를 연 3총사

글/오토다이어리 편집장 오종훈
70년대 중반, 지금은 초등학교라 부르는 ‘국민학교’ 시절, 짝꿍과 장난치느라 정신없었던 와중에도 기억에 남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다. “이 다음에 너희들이 크면 모두가 자동차 한 대씩 가지고 다니는 세상이 온다.” 내가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부자가 되는 건가? 흘려들으면서도 괜히 기분 좋았었다. 이른바 ‘마이카 시대’가 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 집에, 그러니까 내 아버지의 자동차가 생긴 건 87년이었고, 내 생애 첫 차를 구입한 건 91년이었다. 아버지는 50대 초반, 나는 20대 후반에 마이카 시대를 맞이했다. 모터리제이션, 그러니까 자동차 대중화의 시기는 한국 자동차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부자들의 전유물에서 중산층 가정의 필수품이 되는 시기였고,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세계무대로 뻗어 나가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 시작점은 88년이었다.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한국 사회는 큰 변화를 겪는다. 근현대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던 시기다. 달러, 유가, 금리 3저 호황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는 큰 폭의 성장을 이어가는데 자동차 산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해 자동차 내수판매 규모는 52만대로 전년보다 10만대가 늘었다. 89년에는 다시 24만대가 늘어난 76만대가 팔렸고, 90년 95만대를 거쳐 91년에 110만대를 넘긴다. 불과 4년 사이에 내수 시장 판매 규모가 두 배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던 시기다. 이 같은 성장에 힘입어 90년 자동차 보급대수 300만대를 넘긴 한국은 93년에 600만대를 넘긴다. 불과 3년 만에 두 배에 이른 것. 정부의 경기부양 정책에 힘입어 자동차는 내수시장에서 크게 성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 시장 개척에도 적극 나설 수 있었다.

내수시장이 크게 확대되면서 자동차 제조사들은 자동차 메이커로서의 토대를 차근차근 다져나간다.소하리 공장에서 시작한 기아차는 90년 아산공장을 준공했고, 현대차는 91년에 엔진과 변속기를 독자기술로 개발하고 95년 전주공장을 완공한다. 이는 자동차 메이커로서의 경쟁력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된다. 대우자동차는 92년 말 GM과의 합작을 청산한다. GM과의 결별로 독자의 길을 가기 시작한 대우차는 해외시장 개척에 적극 나선다. 쌍용차는 벤츠와 협력을 강화해 나간다. 벤츠와 91년 소형 상용차 기술협력 계약을 체결했고 92년에는 전 차종 기술제휴, 그리고 5% 자본 참여를 이끌어낸다.

삼성자동차가 새로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던 것도 모터리제이션의 후반기다. 92년 6월 삼성중공업이 닛산 디젤과 기술제휴로 대형 상용차 사업을 시작했고 95년에 삼성자동차 법인이 출범한다. 삼성은 98년 4월 중형 세단 SM5를 출시하며본격적인 자동차 사업에 나선다. 이 시기에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차들이 있다. 각사의 대표모델로 현대차 쏘나타, 기아차 프라이드, 대우차 르망을 꼽을 수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쏘나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동차를 한 대만 꼽으라면 단연 쏘나타다. 후륜구동방식의 중형 세단 스텔라의 고급 트림으로 1985년 11월 등장한 ‘소나타’가 그 시작이다. 스텔라의 기본 차체에 1,800cc와 2,000cc 2종의 시리우스 SOHC 엔진을 올린 고급형 모델이었다.



소나타는 크루즈컨트롤에 뒷좌석 전동 시트 등 파격적인 사양을 적용해 “VIP를 위한 승용차”로 소개됐다. 소나타라는 이름이 어감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쏘나타로 이름을 바꾼 뒤 지금까지 7세대 모델로 이어지고 있다. 현대차의 독자 기술로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한국 자동차 산업의 현장을 지켜온 유일한 차종으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장수 모델이다. 

쏘나타는 또한 한국의 자동차 대중화를 이끈 대표 모델이기도 하다. 1985년 출시 이후 약 30년만인 2014년 출시한 7세대 모델로 국내외 누적판매 700만대 판매를 넘긴 쏘나타는 이제 1,000만대 판매를 넘보고 있다.88년 올림픽이 열리던 88년 여름에 2세대 모델로 등장한 뉴쏘나타와 93년 5월에 판매를 시작한 3세대 쏘나타II는 본격적인 자동차 대중화 시기를 관통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쏘나타II는 출시 이후 불과 33개월 동안 60만대가 팔리며 중형차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쏘나타의 품질은 미국도 인정했다. 2001년 4세대 부분변경 모델로 등장한 뉴 EF쏘나타는 2004년 미국 JD파워의 신차품질조사(IQS)에서 중형차 부문 1위에 올라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외에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기록을 남기며 쏘나타는 지금도 시장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는 모델 중 하나로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 대표 자동차로서의 면모를 지켜나가고 있는 것.



기아차의 자존심, 프라이드

자동차 대중화 시기, 기아차의 대표를 꼽으라면 단연 프라이드다. 내 생애 첫 차이기도 하다. 결혼을 하면서 중고로 구입한 차였다. 자동차 기자 생활을 시작한 나는 그 차를 타고 전국을 누볐다. 기아차의 자존심(프라이드)이자 나의 자존심이었던 프라이드였다. 프라이드는 정부의 정책 변화가 낳은 차였다.

87년 정부가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를 해제하면서 규제에서 풀린 기아차가 프라이드를 만들어 팔 수 있게 됐다. 프라이드는 기아차와 미국의 포드, 일본의 마쓰다가 협력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일본 마쓰다가 개발을 맡고, 생산은 기아차, 미국 내 판매는 포드가 맡는 방식이었다. 미국에서는 ‘포드 페스티바’로 불렸고, 일본에서는 ‘마쓰다 121’이란 이름으로 팔렸다.

프라이드는 70마력을 발휘하는 1.1l 가솔린 엔진과 78마력의 1.3l 가솔린 엔진을 갖췄다. 변속기는 5단 수동과 3단 자동이 적용됐다. 초기에 카뷰레터 엔진으로 시작해, 전자제어 방식의 엔진으로 발전해 나갔다. 프라이드의 등장으로 국내에서도 해치백(뒤에 위아래로 여는 문이 달린 차) 시장이 열렸다. 초기에는 “꽁지 빠진 닭” 같다는 놀림도 받았지만 작은 크기에 상대적으로 효율적인 힘, 합리적인 가격 등은 차를 소유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좋은대안이었다. 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본격적인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여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소형 해치백으로 시작한 프라이드는 이후 다양한 차체로 진화했다. 트렁크를 확대한 세단형 ‘프라이드 베타’가 대표적인데, 마쓰다와 상관없는 독자개발 차였다. 기아차는 이어 지붕을 천으로 만든 ‘캔버스탑’ 모델, 대우자동차의 경차 ‘티코’에 대응하기 위한 ‘프라이드 팝’ 등 다양한 모델을 내놓아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1세대 프라이드는 2000년 단종됐다. 한동안 잊혀진 이 차는 2005년 부활한다. 현대차그룹으로 편입된 기아차가 소형차 이름으로 다시 프라이드를 들고나온 것이다.


대우차, 월드카 르망

기아차에 프라이드가 있었다면, 대우차에는 르망이 있었다. 르망은 독일 오펠 ‘카데트’의 한국 버전이다. GM이 월드카로 개발해 독일 오펠에서 카데트로 생산하던 차를 대우차가 한국형으로 생산했다. 르망은 ‘맵시나’ 후속으로 1986년 7월부터 생산을 시작, 1997년 2월까지 10년 넘게 명맥을 이어갔다. 대우차의 전성기는 한국의 자동차 대중화 시기와 일치하고 그 시기를 관통하는 모델이 르망이었다. 대우차 역사상 단일모델로 10년 이상 명맥을 이어간 차종은 르망과 로얄살롱 뿐이다.르망은 곡선형 차체로 주목을 끌었다. 직선과 각이 주를 이루던 당시에 이미 에어로 다이내믹 스타일을 선보였던 것. 공기저항계수라는 개념조차 희박했던 시절 르망은 공기저항계수 0.32를 자랑했다.



이는 철판을 곡면으로 다듬어내는 가공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자유자재로 철판을 가공해 원하는 디자인을 만들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철판을 구부려 곡면을 만드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디자이너가 곡선을 이용해 멋진 디자인을 완성해도 이를 구현할 기술이 부족했던 것. 이 때문에 둥글둥글한 르망의 모습은 그 자체가 경쟁력이었다. 르망은 하나의 이름으로 다양한 차체 형식을 구현했다. 3도어 해치백, 5도어 해치백, 4도어 세단, 2인승 밴 등을 망라했다. 컨버터블(지붕이 개폐되는 차)을 빼고 다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8년에 등장한 르망 레이서는 짧은 차체에 스포티한 이미지를 간직한 3도어 해치백이었다. 1991년 2월에는 튜닝 버전인 르망 이름셔가 출시됐다. 소형차에 파격적인 2.0 엔진을 올리고, 고속 주행을 높이기 위해 ‘에어 스포일러’ 등을 달아 고성능 세단에 목말라하던 자동차 마니아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해방되던 1945년 7,386대에 불과했던 국내 자동차 보유대수는 지금 2,000만대를 넘겼다. 2.4명당 1대꼴이다.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지나 포화상태에 접어들고있다. 마이카 대신 여럿이 차를 공유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는 200여개에 이른다. 그중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자국의 자동차 브랜드와 기술로 완성차를 만드는 나라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중 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2016년 자동차 생산량 기준 전 세계 6위다. 2015년까지는 줄곧 5위였다. 전쟁의 폐허에서 드럼통을 펴서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한 한국이 불과 60여 년 동안 일궈낸 성적표다. 기적이 따로 없다. 오늘이 있기까지 힘을 보태고 땀을 흘린, 한국의 자동차 산업 종사자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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