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의 포니와 한국의 자동차 시대상

글/글로벌오토뉴스 국장 채영석
2차 세계 대전 등 전쟁을 겪은 나라 중 국민 소득 1만 달러를 돌파한 나라는 독일과 일본, 대만, 그리고 한국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자동차 산업을 비롯한 제조업의 부흥입니다. 특히 자동차 산업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사건으로 지금도 전 세계인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초 골드만 삭스 등 투자 은행들이 자동차 회사는 10개, 혹은 6개만 남고 모두 사라진다고 했을 때 그 리스트에 현대 기아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그룹은 2005년 기준 약 370만대를 판매해 세계 5위에 올랐고, 2014년에는 연간 806만대를 판매했습니다. 그것은 자동차 산업 시작부터 기술 자립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 결과였습니다.




최초의 국산 고유모델(국산화율 90%: 참고로 국산율과 국산화율은 다르다) 승용차 포니가 바로 그 시작이었습니다. 1960년대 말 현대자동차는 포드와의 사업추진이 허사로 돌아가자 이탈리아 디자이너 주지아로에게 스타일링을 맡겨 한국형 승용차 "포니" 개발에 성공합니다. 이후 1974년 10월 제55회 토리노 모터쇼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함으로써 한국산 고유모델 시대를 열었습니다. 한국인의 취향과 체격, 그리고 도로사정에 맞는 경제형 차인데다가 내구성이 좋아 큰 인기를 끌었으며, 마이카 시대를 열어준 차량이었습니다. 포니가 출시된 뒤 승용차 시장의 80% 정도였던 라이선스 모델의 중형차는 밀려나고 소형차 시대가 열렸습니다.




포니는 1975년 12월 생산에 들어가 1976년 2월 울산공장에서 첫 출고됐습니다. 시판 첫해에 1만 726대가 판매되었고, 국내 승용차 시장 점유율 43.6%를 차지하면서 단번에 최고 인기차로 떠올랐습니다. 1976년 당시 차량 가격은 227만 3,270원이었습니다. 

1975년 7월에는 국산 승용차로선 처음으로 에콰도르에 5대가 수출됐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포니 시리즈는 1984년 단일 차종으로서는 처음으로 50만대 생산을 돌파하였으며, 1975년 12월~1985년 12월까지 29만 3,936대(내수 22만 6,549대, 수출 6만 7,387대)가 생산됐습니다. 1977년에는 1,439cc 92마력짜리 엔진과 왜건, 픽업트럭 등 다양한 파생 모델도 등장했습니다. 

포니는 말 그대로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이고, 세계 시장에 현대는 물론이고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알린 첫 번째 모델이었습니다. 더불어 오늘날 한국이 세계 자동차 생산 대국 5위는 물론 당시에는 대부분의 전문가들로부터 무모하다는 비판을 받았었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생존 자체에 대한 불확실한 미래가 팽배해 있었지만 '맨땅에 헤딩하기' 정신으로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만큼 절박했고 그런 상황에서 과감한 투자와 결단으로 기간산업의 총아이자 종합 예술품인 자동차 산업만이 국가 경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신념이 일궈낸 작품인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결단을 내린 경영진들의 판단력도 물론 평가해야 하지만 그 안에서 불가능을 극복해 낸 구성원들의 자세 또한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1960년대 건설업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현대는 1967년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이 역시 ‘불가론’이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 초기에는 자동차 생산을 미국의 거대 다국적기업 포드와 기술계약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포드로부터 모델 생산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포드의 모델을 현대자동차의 공장에서 생산하는 방식으로 시작했습니다. 이에 1968년 11월부터 코티나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1969년에는 포드의 대형차인 20M, 1974년에는 뉴 코티나를 잇달아 출시했습니다. 그 결과 국내 승용차 시장 점유율 8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포드와의 합작투자에 관한 계약 연장 과정에서 1973년 협상이 결렬되어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기술력이 없었던 현대자동차로서는 선진기업의 기술 제공 없이는 자동차를 생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자동차의 경영진은 두 번째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고유 모델의 개발이었습니다. 고유 모델이란 자동차의 부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메이커에서 개발 생산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모델에 대한 기획을 주도하고, 디자인이나 기술적인 내용은 외부로부터 공급받을지라도 그 모델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갖고 있을 경우 그것을 고유 모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동차 시장이 연간 1만대 전후였던 한국의 상황에서는 자동차 산업의 요체인 규모의 경제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적어도 연간 5만대 이상 생산해야 자동차 회사로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는 4만대 이상을 수출할 수 있는 ‘고유 모델’ 개발을 결단했습니다. 자체적으로 판권을 가진 모델이 아니고는 해외시장에 수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라이선스 모델 대신 고유 모델을 개발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다시 한번 불가론을 내세웠습니다. 대규모 양산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최소 300억 원 이상이 필요했었는데, 현대자동차는 자본금이 17억 원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의 경영진은 세계의 투자자들을 찾아다니며 차관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미쓰비시와의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해결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전 세계가 석유파동으로 인한 충격에 휩싸여 있었던 시절입니다. 현대자동차는 기본 엔진을 1.3리터 급에 맞추고,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유명한 차체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설계는 만토바니에게 의뢰했습니다. 주지아로는 5인승 4도어 모델과 4인승 2도어 쿠페 두 모델을 제시했고, 4도어 모델이 최종 선정됐습니다. 여기에 미쓰비시의 4기통 1,238cc 새턴 엔진과 4단 수동변속기를 얹은 현대의 첫 독자 모델 포니는 개발을 시작한 지 불과 1년 6개월 만인 1974년 10월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제55회 토리노 모터쇼에서 출품됐습니다.




포니는 처녀 출품한 작품이었지만 한국에서 처음으로 만든 차량이라는 점과 비슷한 시기 폴크스바겐 골프를 디자인한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한 소형차라는 점에서 높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런 관심에 힘입어 현대자동차는 1975년 12월 울산에 연간 생산능력 10만 대 규모의 종합공장을 세워 50대의 포니를 시험 생산했고, 1976년부터 4도어 해치백 포니1의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갔습니다.

이어서 1976년 픽업을 비롯해 1977년에는 왜건, 1978년에는 배기량 1천439cc 92마력 엔진을 얹은 포니 1400을 출시했습니다. 1982년에는 차체 모서리 인테리어를 현대적으로 바꾼 포니2로 변신해 ‘한국의 벤츠’로 불리며 높은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암담한 상황에서 한국이 만든 자동차라는 사실이 국민들에게는 큰 자부심으로 여겨졌고, 그러한 자부심은 운전기사를 둔 자가용으로까지 사용하게 했습니다.



포니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시장에서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현대는 1976년 7월 남미 에콰도르에 5대를 시작으로 중동, 남미,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를 중심으로 포니를 수출했습니다. 1983년 현지법인을 통해 캐나다에 진출한 포니2는 1984년 캐나다 수입차 판매 1위를 차지해 훗날 포니2의 후계차인 엑셀이 미국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초석을 다지기도 했습니다. 포니는 포니2 픽업이 1990년 단종될 때까지 국내외에서 모두 66만 1천501대가 판매되었습니다.
  • 페이스북
  • 네이버블로그
  • 카카오스토리
상단으로